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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구구절절 인제의 전설

인제 지네와 옥녀탕

화해고개 전설/김부리와 식량리

방동약수/대승폭포/닭바위/용소폭포/오세암/백담사

#인제읍

인제읍 합강미륵

인제 지역은 산이 많아 옛날부터 좋은 목재를 많이 생산하였습니다. 이 목재는 주로 강을 따라 뗏목으로 서울까지 운반하였습니다. 출발하는 곳이 지금의 합강교 근처였습니다. 옛날에 인제읍에 박명천이라는 나무 장수가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내가 이 강물 속에 묻혀 갑갑하기가 참을 수 없는 지경이니 나를 건져 주게나.” 꿈에서 깬 박명천은 꿈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잠수를 잘하는 친구 김성천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물 속에 들어가서 살펴봐주게.” 친구 김성천은 즉시 준비를 하여 합강 물 속에 제일 깊은 곳에 들어가 살펴보던 중 수 척이나 되는 빛나는 돌기둥을 발견하였습니다. 박명천은 사람을 불러 모아 물 속에서 돌기둥을 건져내어 미륵불을 만들고 그 옆에 조그마하게 누각을 짓고 미륵불을 세워 모셨습니다. 그 후부터 박명천과 김성천은 하는 일 잘 되어 부자로 잘 살았다는 합니다.

점봉산과 주전

인제읍 귀둔 2리와 기린면 진동 1, 2리 경계로 하고 있는 점봉산(1,424m)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때 나라에서는 상평통보라는 엽전을 만들어 백성이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봉산(속칭 덤붕산) 깊숙한 골짜기의 바위굴에 숨어 어떤 사람이 몰래 돈(엽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깊은 산 속에 숨어서 엽전을 만들었으나 이 비밀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졌다고 합니다. 뚝딱뚝딱 망치질하는 소리가 마치 “덤붕산 돈 닷돈, 덤붕산 돈 닷돈”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듣고 노래처럼 부르게 되었고,

이 신기한 노래가 관리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어 결국 몰래 돈을 만들던 사람들은 모두 들켜 잡혀갔고,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점봉산 근처에서 꽹가리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덤붕산 돈 닷돈” “덤붕산 돈 닷돈”하고 친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봉이 김선달 보다 더한 차소백

인제읍 귀둔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귀둔에 차소백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차소백은 다른 사람을 잘 속였습니다. 그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는 인제서 한양까지 걸어서 오갔습니다. 그 당시는 인제에서 한양까지 가려면 보름 동안이나 걸어서 다녀야 했습니다. 차소백은 담배를 아주 많이 피웠는데 담뱃대 하나만 들고 다니면서 모두 해결을 하였습니다.

른 담배를 담뱃대에 넣어 피우는데, 차소백은 담뱃대에는 젖은 담배를 넣고 다니다가 길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을 만나면 말을 걸었습니다. “담뱃불 좀 빌립시다.” 차소백은 자기 담뱃대에다 불을 붙이는 척하며 남의 담뱃대를 푹푹 빨아서 담배를 피우곤 했습니다.

담배가 젖어 있으니 불이 붙을 리가 없지만, 젖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면서 불이 안 붙는다며 남의 담뱃대를 빨아서 해결한 것입니다. 이런 차소백의 행동은 소문이 나서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한양에서 사람들을 속였는지 사람들은 차소백 만나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 당시 강원도에서 서울을 오갈 때는 망우리재를 넘어야 했습니다. 망우리재에는 돌서낭옛날 마을에서 수호신으로 믿는 마을의 신, 성황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은 지나면서 바닥에 있는 돌을 들어서 그 서낭에 던지면서 소원을 빌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서울에서 강원도로 올 때 가장 많이 비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시골 내려가서 차소백을 안 만나게 해주십시오." 차소백을 만나면 뭐든 속고 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차소백이 평창 대화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장이 서면 며칠씩 아주 크게 섰습니다. 장에는 별의별 장사꾼이 다 왔고, 사기꾼들도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차소백은 장에서 사기꾼이 화투장을 섞어 놓고 알아맞히는 게임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사람들을 속여서 돈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차소백은 그런 사기꾼을 혼내주기로 마음을 먹었고, 한참을 생각하다 좋은 수가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새끼손가락의 손톱이 긴 것을 이용하기로 하고 얼른 숙소로 들어가서 기다란 손톱을 바늘처럼 가느다렇게 갈았습니다. 준비를 끝낸 차소백은 다시 사기꾼에게로 가서 모르는 척하고 물었습니다.

“이거는 어떻게 하는 거요?" 그러자 사기꾼은 같은 걸 찾으면 건 돈에 세 배를 준다며 게임에 참여하도록 꼬셨습니다. 그러자 차소백은 얼른 날카롭게 간 손톱으로 화투장을 가리키는 척하며 말했습니다. “이거 말입니까?" 화투장 뒤에 손톱으로 콕 찍어서 차소백만 알아볼 수 있게 표시를 해둔 것입니다.

그러고는 순진한 척 게임에 참여했습니다. 사기꾼들이 패를 막 섞은 후 맞춰 보라고 하자 차소백은 이미 표시를 해 두었으므로 한참 고르는 척하다가 자신이 표시를 해둔 화투장을 들었습니다. 차소백이 정확이 맞추자 사기꾼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다시 한판 더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이 이게 실수로 맞은가 보네" 차소백은 또 돈을 걸고 더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맞은 것이었다. 그러자 차소백은 좋아하며 말했습니다. “아, 내가 실수로 또 맞췄네” 사기꾼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계속해서 게임을 하였고, 그렇게 몇 번을 하고 나니 사기꾼은 가진 돈을 몽땅 잃고 말았습니다. 이미 차소백이 표시를 해 두었으니, 아무리 사기꾼인들 차소백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기꾼이 돈을 다 잃고는 얼굴 색이 변하며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주변에 있는 패거리를 모아서 차소백을 어떻게 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알아차린 차소백은 그 사기꾼을 향해 한마디 했습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 시골에 산다는 차소백이라고 들어봤냐? 내가 바로 차소백이야. 감히 누굴 속이려고 그래. 이놈들아"

이 말에 사기꾼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차소백은 천하의 속임수를 쓰는 사기꾼을 속여먹기도 했습니다. 봉이 김선달은 대동강물을 팔아먹었지만 차소백은 속이기에 달인인 사기꾼을 속인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돌서낭에 돌을 던져 소원을 빌면서 ‘차소백을 안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 했을까요?

#남면

신남리 닭바위와 망한부자

남면 신남 1리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형태가 닭처럼 생긴 바위에 얽힌 전설입니다. 신라시대에 김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하루에도 지나는 손님이 20여명씩 찾아와 김 부잣집은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집 며느리는 매일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하면 손님을 안 오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늙은 스님이 지나가다가 시주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며느리는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시주는 얼마든지 할 터이니 손님이 안 오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늙은 스님은 앞산에 있던 닭처럼 생긴 바위를 가리키며 닭 벼슬로 보이는 곳을 도끼로 깨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며느리는 바로 그곳으로 가 닭 벼슬처럼 보이는 바위 부분을 도끼로 깨어버리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그 후 이상하게도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고 몇 해 동안 계속해서 집안에는 안 좋은 일이 생기겨 김씨 집안은 망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지역 노인들은 첫 새벽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흉년이 온다고 불길해 하고 있습니다.

닭조형물

닭바위 계암정

고곰을 앓지 않게 해주는 덤불 할머니

남면 신풍리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삼을 삼았습니다.삼이나 모시 따위의 섬유를 가늘게 찢어서 그 끝을 맞대고 비비 꼬아 잇는 것 어느 날 손녀딸이 삼을 삼는 것이 귀찮아 개울가에 나가서 놀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개울가에 있던 덤불에서 덤불 할머니가 앉아서 말했습니다.

“이리 오너라.”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덤불 할머니가 왜 나를 오라고 하지?’라며 의아해하며 할머니에게로 갔습니다. 할머니가 다시 말했습니다.
“너네 집에 가서 네 할머니한테 떡을 가져오라고 해라”
“네가 가서 떡을 가져오면, 내가 일 년 동안 고곰학질의 방언, 말라리아, 모기에 의해 전염되며, 고열이 나며 설사와 구토, 발작을 일으킨다.을 안 않게 해 줄게.”

옛날에는 고곰이라 병이 있었는데 걸리면 며칠 동안 앓기도 하는 병이었습니다. 고곰이 무서운 병인 것을 알고 있는 아이는 집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이 얘기를 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저 덤불 할머니가 떡을 가져오래요. 떡을 가져오면 고곰을 안 앓게 해 준다고 떡을 달래요.”
그런데 시골에서 갑자기 떡을 구할 수 없어서, 할머니는 메밀로 묵을 만들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걸 갖다 덤불 할머니에게 드려라.”
아이는 할머니 말대로 메밀로 쑨 묵을 덤불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동네 아이들이 모두 고곰에 걸렸을 때도 아이는 고곰을 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메밀묵을 덤불에 가져가서 “덤불 할멈, 덤불 할머니, 메밀묵 잡수시고 나 일년 열두달 고곰 안 앓게 해주세요.” 라고 빌면, 그 아이는 일년 동안 고곰을 안 앓았다고 합니다.

토끼봉의 전설

남면 갑둔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예전 갑둔초등학교 동쪽에 천지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해발 680미터의 조그마한 산이 있는데 마치 토끼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이를 토끼봉이라고 하였습니다. 근처에 두꺼비바위와 떡바위도 있었습니다.

옛날에 이곳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결혼한 지 3년이 되어도 자식이 없어 고민이 많았습니다. 부부는 김부대왕께 찾아가 소원을 빌었습니다. 김부대왕은 부부의 딱한 사정을 들은 후 부부에게 절을 짓고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려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날부터 이 부부는 지금의 토끼봉과 두꺼비바위 사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웠습니다. 절을 다 지은 다음에는 백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깨끗한 물로 밥을 지어 부처님 앞에 놓고 정성을 다하여 빌었습니다.

100일째 되는 날에는 하얀 시루떡을 해다 놓고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때 천지산에 있던 토끼와 천지골에 있던 두꺼비는 매일 같이 자기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 보면 부처님께서 밥을 혼자 먹어 치우기 때문에 항상 입맛만 다시고 돌아 갔었습니다.

100일째 되는 날도 토끼와두꺼비가 와 보니 먹음직스러운 시루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부처님이 그 떡을 토끼와 두꺼비에게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토끼와 두꺼비는 어찌나 반가웠던지 서로 많이 먹으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이 광경을 보시고 말했습니다.

“중생들의 못난 짓들이구나!” 그리고는 떡시루를 집어서 개울 건너로 던져버렸습니다. 토끼는 부끄러워서 머리를 돌렸고 두꺼비는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앞발을 쳐들었습니다. 이때 하늘에서는 번개가 일고 천둥이 쳤습니다. 그러자 토끼와 두꺼비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던져버린 시루떡은 세 조각으로 갈라져 큰 바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이들 부부에게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과 토끼 같은 딸 쌍둥이가 태어나 잘 기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김부대왕이 죽은 후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김부대왕각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며 동네 사람들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대왕각에 가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탑과 절 주초만 남아 있고 토끼가 앉아 있는 모습의 토끼봉과 두꺼비모양의 바위(일명, 춧대바위)가 있고 건너편에는 떡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기린면

또 닦아라, 똥꼬야

기린면 서2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소금장수 직접 돌아다니며 소금을 팔았다고 합니다. 소금값을 비싸게 받기 위해서 시골의 산속으로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한 소금장수는 무거운 소금 가마니를 지고 고개를 넘어서 소금을 팔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고개, 두 고개, 세고개를 아주 힘들게 소금을 지고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동네 하나가 보였습니다. 동네에 도착하니 농사꾼들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금장수가 힘들게 고개를 넘다보니 갑자기 똥이 마려웠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변소가 어디 있소?” 한 농사꾼이 대답했습니다. “여기가 밭인데 뭔 변소가 따로 있소. 거 아무 데나 누고 싶은데 누시오" 그래서 소금장수는 소금 지게를 내려놓고 풀숲에 들어가서 똥을 누었습니다. 그런데 똥을 누고 나니 마땅히 밑을 닦을 것이 없었습니다.

급히 똥이 마려워서 종이를 따로 마련한 것도 아니고, 옆에 밑 닦을 만한 나뭇잎도 없었습니다. 반반한 돌이라도 있으면 닦을 수 있을 것인데, 그것마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밑 닦을 것을 찾다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 보니, 웬 송장 뼈다귀였습니다. 허연 것이 밑 닦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아무 생각 없이 송장 뼈다귀를 들고 ‘스슥’ 밑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뼈다귀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또 닦아라, 똥꼬야. 또 닦아라, 똥꼬야” 소금장수는 기겁을 하고 바지를 얼른 추스르고는 소금지게를 지고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정말 걸음아 나 살려라고 소리를 치면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하다 보니,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또 닦아라, 똥꼬야’라고 소리치며 따라오던 뼈다귀도 따라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금장수는 주변에 보이는 한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 들러서 부탁을 했습니다. “지나가는 소금장수인데 배가 몹시 고파 그러니 밥 좀 주세요.”

마침 그 집에서는 빨강치마에다 노랑저고리를 입고 하얀 앞치마를 한 어떤 젊은 여자가 나왔다. 그래 소금장수가 그 젊은 여자에게 밥을 얻어 먹을 수 있는지 부탁했습니다. “밥 좀 얻어먹고 갈 수 없소? ”그 여자는 순순히 밥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방에 소금장수를 들어오라 하고는 부엌에 나가서 밥을 차렸습니다.

있는 것 없는 것 잔뜩 차려 밥상 가득 음식을 내왔습니다. 소금장수는 마침 배가 몹시 고프던 터라 젊은 여자가 차려주는 밥을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렇게 밥을 먹다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보니, 밥상을 차려준 여자가 재주를 넘고 있었습니다. 재주를 세 번 홀짝홀짝 넘더니 어느새 도깨비로 변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방망이를 들고는 밥을 먹고 있는 소금장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까 밑을 닦았다가 쫓아오면서 소리치던 뼈다귀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닦아라 똥꼬야. 또 닦아라, 똥꼬야.” 도깨비가 슬슬 다가오자 소금장수는 밥을 먹다 말고 얼른 그 무거운 소금지게를 지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뼈다귀로 소금장수가 똥을 닦자 그 뼈다귀가 도깨비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도깨비는 소금장수가 소금지게를 지고 고개 몇 개를 넘을 때까지 쫓아오면서 계속 말했습니다. “또 닦아라, 똥꼬야.” 소금장수는 실수로 뼈다귀로 밑을 닦았다가 아주 큰 봉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뱀의 원한을 사서 과거급제 못할 뻔한 사람

기린면 서2리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겪었던 일입니다. 길을 가다가 뱀을 만나서 갖고 있는 작대기로 뱀을 때렸는데, 뱀이 죽지 않고 허리가 잘린 후 대가리만 내빼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 사람은 그 후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고.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어 서울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게 되었다. 시험을 보기 전에 합격할지 궁금해서 점을 보았는데 점괘가 이상하게 나왔습니다.

“서울에 과거 시험을 보러 갔다가 죽지 않으면 합격을 하고, 죽으면 합격을 못한다." 그 사람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서울에 과거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지금은 차를 타고 서울에 가면 금방 가지만, 옛날에는 걸어서 가야 하므로 한 달 이상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걸어가다가 밤이 되면 주막에서 자고 다음 날이 되면 또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하여 과거를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 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날이 저물어 잘 데가 없어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막 헤매고 있는데 저 멀리서 하얀 불이 보였습니다. 다행이라 여기고 그집으로 가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계십니까?” 아주머니의 대답이 사정을 말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그러니 자고 가도 됩니까?” 아주머니가 순순히 자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예 그러세요.” 오막살이 같은 집의 방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먹을 것을 내왔습니다. 밥을 먹고 앉아 있다가 아주머니가 길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근데 아주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혀가 두 가닥이 나와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혀가 두 가닥이면 뱀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때 전에 보았던 점괘가 떠올렸습니다. ‘죽지 않으면 과거 시험에 붙는다.’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 뱀을 때려잡은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뱀 대가리가 살아서 도망간 것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집을 나가겠다’고 생각하고는 집을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못 가게 막으며 말했습니다. “아, 이 밤중에 이런 집을 두고 어디를 갑니까?"그 사람이 거기 있으면 죽을 것을 아는데 그곳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억지로 집을 나서자마자 있던 집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게 도망을 치는데 ‘쓰록 쓰록 으르륙’ 하면서 뱀이 쫓아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쫓기다가 고개를 올랐더니 가까운 곳에 불이 켜진 집이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그 집으로 뛰어들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사람 살려 주세요" 그 집에 들어가니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이 되어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그곳은 집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을 모셔 놓은 묘가 있는 산이었습니다. 조상 묘 옆에서 하룻밤을 잔 것이었습니다. 일어나서 자세히 살펴보니 무덤 옆에 개 모양의 돌이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뱀이 죽어 있었습니다. 조상과 개 모양의 돌이 뱀을 물리치고 후손인 그 사람을 지켜 준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후로 잘 살았다고 합니다.

북리 인명골

기린면 북리에는 길이가 4km 이상이나 되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아득한 예전에 이 골짜기에 개도 아니고 여우도 아닌 짐승이 밤마다 시끄럽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 골짜기를 가리켜 ‘기린이 울었다’하여 인명골(麟鳴谷)이라고 불러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린”이라는 지역의 이름도 전설의 동물인 기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사슴이 100년 이상 묵으면 기린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이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 “장수바위”에는 조선시대 말 명장들이 한양에서 영동지방으로 넘어갈 때면 들려서 자연을 만끽하며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쉬었다 가곤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전설로만 남아 있습니다.

기린상

기린상

심뫼마니와 방동약수

기린면 방동리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에 심뫼마니인 한 노인이 사시사철 이 산에 이르러 몸을 단정히 하고 매일같이 산신에게 정성을 드렸다고 합니다. 하루는 심뫼마니의 꿈에 하얀 도복을 입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 산의 산신령이다. 사시사철 정직하게 나에게 지성을 다하니 내 어찌 너의 지성을 지나칠 수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산삼을 주리라 그리고 그 산삼이 있는 곳, 깊은 땅 밑에 만병통치수가 있으니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어 그 약수로 하여금 병들은 사람들을 먹게 하여 낫게 끔 하라”

백발 노인이 사라지고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이상히 여긴 심뫼마니 노인은 다음날 여느 때와 똑같이 산삼을 캐러 가는데 갑자기 동자가 나타나서 손짓으로 오라고 하기에 그 곳에 가보니 동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육구만달(제일 큰 산삼) 산삼이 있었다고 합니다.

심뫼마니는 정성들여 산삼을 캐어 바구니에 담아 놓고, 꿈에서 만난 백발 노인의 말대로 땅 밑을 파보니 땅 밑에서 약수가 솟아났습니다. 심뫼마니 노인은 그 후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만병통치의 약수를 알리면서 살아왔고 병 든 사람들은 이 약수를 먹으면 즉시 효력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이 방동약수에는 찾는 이가 늘어났으며 지금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고 합니다.

#상남면

미산의 파리먹이

미산 1리 고목동(古木洞) 어귀의 파리먹이에 얽혀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조선 선조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이율곡 선생의 부친이 길을 가다 해가 저물어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걷다보니 피곤하여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꿈에 갓을 쓰고 흰 옷을 입은 도사가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너의 아들이 수명이 길지 못하다.”
부친은 어떻게 하면 아들의 수명이 길게 할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도사님는 순식간에 호랑이로 변하더니 말하였습니다.
“이곳에다 밤나무 천 그루를 심고 떠나라.”

도사님이 사라짐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부친은 이율곡 선생과 아침부터 서둘러 며칠을 묵으면서 밤나무를 구하고 심었습니다. 마지막 나무를 심던 날 낮에 꿈에 본 호랑이가 다시 나타나 물었습니다.

“밤나무 천 그루를 다 심었느냐?”부친은 다 심었다고 하자 호랑이는 밤나무를 세어보기 시작했습니다.
“999그루 밖에 안 되잖아. 한 그루는 왜 안 심었느냐?”

부친은 당황하여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있는 데 옆에서 잡목 한 그루가 나타나더니 말하였습니다.
“나도 밤나무”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라졌고 부친은 잡목 때문에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튀어나온 밤나무는 열매를 맺기는 하였으나 알맹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다른 밤나무들과 같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래된 밤나무가 많아 고목동이라고 부르고, 이곳 지형 모습이 파리먹이와 비슷하여 파리먹이로 불린다고 합니다.

추갑산과 구미호

상남면 하남 2리 선래동(仙來洞)은 앞뒤가 산과 바위로 막힌 깊은 산골입니다. 그러나 기암절벽과 산수의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 예부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놀던 곳이라는 뜻으로 선래동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곳은 7세대가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때는 조선시대 중엽으로 이 마을에 추씨라는 사람이 사냥에 의존하여 하루하루 생활을 영유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추씨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산을 헤매다 마침 흰털을 가진 짐승을 발견하여 가지고 간 총으로 짐승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죽은줄 알았던 짐승은 총알을 받아 땅에 떨어뜨리고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추씨는 다시 여러 번 총을 쏘아댔습니다. 그러나 짐승은 그 많은 총알을 발로 받아 땅에 수북하게 쌓아 놓고 꿈쩍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추씨는 기진맥진한 가운데 지쳐서 그만 땅에 쓰러졌습니다.

이때 집에 있던 아들 갑산은 사냥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총소리만 계속 들리자 걱정이 되어 총성이 들리던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지쳐서 쓰러진 모습에 놀란 갑산은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지만 너만은 살아야지.” 갑산에게 집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들 갑산은 주변에 흰털이 있는 짐승과 그 앞에 쌓여있는 총알들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말하였습니다. “저 짐승은 아무리 총을 쏘아도 총알을 받아 땅에 놓으니 어서 피하거라.”

아들 갑산은 의지가 강한지라 아버지의 총을 갖고 화약만 넣은 채 총을 사정없이 계속 쏘아댔습니다. 그 짐승은 아들의 총 쏘는 묘기에 놀라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쓰러진 짐승은 꼬리가 아홉개가 달린 백호였습니다.

이 호랑이는 그 당시 100년을 이곳에 살면서 인간에게 피해를 주었다 하여 그 후부터는 구미호(九尾虎)로 불리워졌고 이 산을 아버지 추씨와 아들 갑산의 이름을 따서 그 후부터는 추갑산(秋甲山)이라고 불려져 내려온다고 합니다.

학칠령 골

옛날 상남면 상남 3리에 살던 어떤 사람이 아버지 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명당에 모실 생각으로 지관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地官)에게 산소를 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지관은 먼저 다짐을 요구했습니다.

“산소 자리를 내가 잡아주되, 내 말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상주는 지관에게 그러겠다고 쉽게 약속을 했습니다. 지관은 양지바른 한 골을 묫자리로 잡아주었고, 그는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산자리를 팔 때 넓적한 돌이 나오면 더 이상 파지 말고 관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자손 중에 귀인이 나와 집안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묘지를 팔 때 아무리 친한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아는 체 하지 말고 인부들이 바위를 뒤적이지 않도록 지키십시오."

장삿날이 되어 그 상주는 지관이 가르쳐 준 곳에 묘를 폈습니다. 상주는 인부들이 묘를 파고 있을 때 처음에는 지관의 말을 지키느라고 살펴보았으나 평평한 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관의 이야기가 차츰 믿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 그곳으로 찾아온 이웃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상주는 묘지를 지켜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때 인부들은 드러난 넓적한 돌을 파 일구었다. 인부들은 그 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몰랐기 때문에 드러낸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학 한 마리가 ‘푸드득’ 날라 올라 고개 너머로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뒤 늦게 그것은 본 상주는 후회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날아간 학을 다시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묘지에서 학이 날아간 후 지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인지 그 집안을 일으킬만한 인재는 영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상주가 지관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학을 날려 보냈기 때문에 그 후손 중에는 등용되는 인재가 없다고 믿었으며 묘지에서 학이 나와 산너머로 넘어갔다고 해서 이곳을 ‘학칠령’이라 부른다.

#북면

선녀 쫒긴 옥녀탕

먼 옛날 북면 한계 3리 장수대 입구에서 대승령 방향으로 약 2km에 있는 대승폭포에 월궁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지네 괴물이 나타나 옥선녀를 해치려고 하자 선녀는 쫓기어 다른 곳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소까지 도망갔으나 지네가 다시 쫓아와 여전히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선녀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 지네에게 잡히게 될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가 옥선녀의 편을 도와 벼락을 내렸습니다. 지네는 벼락을 맞아 죽고 옥선녀는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곳에서 옥선녀가 놀았다고 하여 옥선녀탕(옥녀탕)이라고 이름 지어 부른다고 합니다.

내설악의 대승폭포

옛날 대승이라고 불리는 총각이 북면 한계리에 살았습니다. 대승은 석이(바위에서 피는 버섯)를 따서 그것으로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하루는 폭포가 있는 돌기둥 절벽을 동아줄을 매고 내려가서 석이를 땄습니다. 잔뜩 석이를 따놓은 참인데 절벽 위에서 “대승아! 대승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승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외침에 소스라쳐 동아줄을 타고 올라갔으나 어머니는 온데간데없고 동아줄에는 커다란 지네가 매달려 동아줄을 뜯고 있었습니다. 동아줄은 막 지네에 뜯겨 끊어지려는 참이었습니다.

대승은 동아줄을 급히 타고 오르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후세에 사람들은 죽어서도 아들의 위험을 가르쳐준 대승의 어머니의 외침이 메아리친다 하여 이 폭포를 대승폭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용대리 백담사

이 사찰은 지금의 화천 땅에 비금사라는 이름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포수들이 짐승을 잡으러 자주 몰리는 탓에 북면 한계리에 절을 옮기고 한계사라고 칭했습니다. 한계리의 온 이 절은 다섯 차례나 화재를 만났는데, 화재를 만날 때마다 주지 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나 절터를 옮기고 이름을 고쳐보라고 말했습니다.

곧장 용대리 양자동에 옮겨 영취사라고 이름을 고치기도 하였으나 이곳에서도 화재를 만났습니다. 그러던 하룻밤, 주지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담수를 세어 보아라”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스님은 그 이튿날, 대청봉에서부터 절 자리까지의 물굽이를 세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는 꼭 일백 개였습니다. 주지스님은 절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우고 이름을 백담사라고 지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절에 화재가 전처럼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세암

오세암은 설악산 백담사에 있는 암자입니다. 다섯 살 된 아이가 폭설 속에서 부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오세암’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세암 전설 이야기

한 스님이 부모 잃은 어린 조카를 암자로 데려와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스님이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아이만 암자에 남겨둔 채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스님이 양식을 구해 암자로 가려고 했으나 폭설 때문에 갈 수가 없어서 눈이 녹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른 봄, 눈이 녹기 시작하자 서둘러 암자로 올라갔는데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스님이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자 어머니(법당 안의 관음보살)가 매일 양식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람 소리와 함께 나타난 백의 선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경전을 주고 파란 백조가 되어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5세에 득도하였다고 하여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세암

오세암

#서화면

서흥리 도깨비 화로

옛날 서화면 서흥 2리에는 함 부자로 통하는 대농의 가족이 살았습니다. 근면 성실한 함 부자는 밭일을 하다가 돌이 나오면 밭의 가운데에 쌓아 두었습니다. 수년이 지나 밭 가운데에는 큰 형체의 돌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해 겨울 이 돌무덤을 들어내기 위해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 작업을 했는데 돌무덤을 거의 치워 중심에 있던 돌을 치우려고 하는데 6척 정도의 뿔 달린 뱀이 둥지를 틀고 동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함 부자는 오래 묵은 뱀이 몸 보신에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즉시 잡아 토막 내어 뱀술을 담갔습니다. 100일 후에 뱀술을 먹으려고 항아리를 열었는데 모두 발효가 되었어야 할 뱀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생생하였습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함 부자는 항아리 채 강물에 띄워 버렸습니다.

그 후 밤마다 석 달 열흘 동안 분위기가 좋지 않고 매우 어수선하였습니다. 일이 있은지 10년이 되었을 쯤 그 마을에 살던 함씨 일가 22명이 모두 시름시름 죽어 갔습니다. 지금도 함부자가 살았다는 집터가 10년 전까지는 서흥리에 남아 있다고 당시 살았던 지역 주민이 전해 주었습니다.

천도리 복숭아

옛날,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큰 복숭아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 생각해서 복숭아가 떨어진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집을 짓고 산지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 그 지방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인근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모두 모여 집을 짓기 시작했고, 몇 년 뒤 이곳은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웃 마을에서는 이 마을을 하늘로부터 복숭아가 떨어진 곳이라 하여 천도리(天桃里) 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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